파주시대

황덕순의 희망을 잇는 사람-7 「원작을 빛내는 번역가들처럼 상대를 빛나게 하자」

입력 2026.06.09 21:02수정 2026.06.09 21:02황덕순 칼럼위원(前 임진초등학교 교장) 기자28

황덕순 칼럼위원(前 임진초등학교 교장)

오랜 기간 사랑받는 사람과 동화의 공통점이 있다. 어린이를 위한 이야기이면서 어른의 마음 까지 움직인다. 70년 전 조선일보에서 시작된 이야기가 오늘까지 감동을 준다. 지난 4월 1일 우리나라에서 칠순을 맞은 ‘어린 왕자(Le Petit Prince·작은 별의 왕자)’는 비행사이자 작가인 생텍쥐페리 작품이다.

독일 침략으로 프랑스가 함락되자 나치를 피해 미국으로 망명하여 쓴 책이다. 그 책을 쓴 배경은 전쟁이 일어나기 전 스무 살 많은 유대인 친구 ‘레옹 베르트’와 깊은 우정을 나누었다. 인종과 연령을 초월한 소중한 친구와 전쟁으로 헤어졌다.

자신은 나치를 피해 자유를 얻었지만 전쟁터에 남은 유대인 친구의 생사를 알 길 없다. 모진 탄압과 생명이 위태로운 고통을 겪고 있을 친구 ‘레옹 베르트’에게 바치는 헌사(獻詞)로 지은 책이 ‘Le Petit Prince’이다. 1943년 ‘레이날과 히치콕’ 출판사가 영어와 프랑스어로 출판했다. 성경 다음으로 많이 읽는 책으로 아직도 모든 세대의 사랑을 받는 책이다.

우리와 인연을 맺은 것은 안응렬 선생 덕분이다. 1955년 프랑스 공사관 통역관 근무를 마치고 귀국할 때 ‘Le Petit Prince’를 선물로 받았다. 안 선생은 귀국하자마자 번역을 시작해 첫 장은 안 선생이 직접 원고지에 썼다. 다음 장부터는 당시 초등학생이던 딸 혜란 양이 받아 써 조선일보에 보냈다.

4월 1일 첫 회를 시작으로 5월17일까지 44회 연재했다. 울타리에 만발한 빨간 장미를 보면 입에 착 붙고 찰진 리듬으로 마음에 쏙 들어오는 ‘어린 왕자’가 생각난다. 탁월한 번역과 귀한 작명 덕분에 대한민국의 성장사를 함께 한 산 증인이 되었다. 칠순을 맞고 고전의 반열에 오른 ‘어린 왕자’는 희망을 잇는 영원한 친구이다.

사람들은 동심으로 돌아가고 싶은 꿈을 꾼다. 피카소는 “정교한 그림을 그리는 것은 힘들지 않았다. 그런데 다시 ‘어린이’가 되는 데 40년이 걸렸다”고 했다. 영국의 계관시인 윌리엄 워즈워스는 “어린이는 어른의 아버지”라고 노래했다. 우리가 어린이였다는 사실을 깨닫게 한다.

어른의 가장 큰 의무 중 하나는 어린이가 꿈을 이룰 점프대를 만들어주는 것이다. 어린이의 마음속에 잠자고 있는 거인의 꿈을 깨울 도약대가 책이다. 사람이 책을 만들고 책이 사람을 만드는 생명 릴레이가 이루어진다. 어른은 어린이들이 닮고 싶고 되고 싶은 ‘인생 책’이 된다.

아빠 어깨 위에서 무등 타던 어린아이가 어느 순간 무한 가능성의 세계로 날아오른다. 광복을 맞고도 6.25 의 전란 속에서 보릿고개를 힘겹게 넘던 어린이들에게 꿈의 도약대를 마련한 분들이 번역가들이다. 쇄국의 빗장을 활짝 열고 개국의 신세계를 열어준 분들이다.

다른 나라 말로 쓰인 글을 우리 말과 글로 새 생명을 불어넣는 분들이다. 번역(飜譯)은 창작에 버금가는 고된 작업으로 잘하면 명작이 되지만 잘못하면 반역(叛逆)이 되어 이름 없이 사라진다. 번역가 박진영은 “번역가는 원작을 빛내고 원저자가 돋보이게 만드는 일을 소명으로 삼는다”고 했다. ‘Le Petit Prince’를 ‘어린 왕자’로 번역한 안 선생의 탁월한 능력 덕분에 한글의 우수성이 빛난다.

50년대 어린이들은 번역가들 덕분에 호강했다. 호롱불 그을음으로 코가 새까매지면서도 밤새 책을 읽었다. 가정의 달 5월을 보내면 아직도 해결되지 않은 6월의 아픈 역사가 다가온다.

그때를 기억하며 ‘어린 왕자’를 다시 읽어보자. “서른에 다시 읽는 ‘어린 왕자’”도 읽어보자. “우리는 언제 어른이 되는가”라는 다른 버전의 ‘어린 왕자’도 읽자. 다른 나라 언어를 우리말로 번역한 번역가들의 마음으로 서로를 이해하고 존중하자.

어린이들이 닮고 싶고 되고 싶은 어른의 길을 가자. 연령과 인종을 초월한 생텍취페리의 우정을 배우자. 어린이를 사랑하고 존중한 탁월한 번역가 안응렬 선생의 마음을 닮자. 파주 시민 모두가 역지사지의 마음으로 상대를 빛나게 하는 파주 시대를 열어가자.

황덕순 칼럼위원(前 임진초등학교 교장)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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