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덕순의 희망을 잇는 사람-8 「녹색 칠판과 분필 하나면 이 시대의 난제를 풀 수 있다.」

황덕순 칼럼위원(前 임진초등학교 교장)
사람의 기억만큼 오묘하고 강력한 것도 없다. 1951년 전시 상황으로 돌아가면 호국보훈의 달의 과제가 보인다.
교실은 파괴되고, 교사와 학생도 피란을 떠나 흩어진 상황에서 부산으로 옮긴 문교부는 2월 10일 전국적으로 개학을 지시했다. 2월 28일 이승만 대통령은 세계 전사에 유례없는 ‘종군 학생 복귀 명령’을 내린다. 그리고 숲과 하천 변, 광장 등 천막을 칠 수 있는 곳에 가교사(假校舍)를 세웠다.
녹색 칠판 하나를 걸고 분필로 가르쳤다. 피란민들은 판자때기라도 등 붙일 곳만 있으면 자식들을 학교에 보냈다. 피란 국민학교 54곳, 중학교 64곳, 서울 훈육소 55곳이 설치되었다.
그 기억을 가슴에 품은 채 새 희망을 그리는 분이 있다. 폐교를 작업실로 개조해 켄버스 대신 칠판에 그림을 그린다. 수십 년 전 판서 흔적이 고스란히 남은 칠판에 살려내는 김영희 작가이다.
1950년대의 순박한 아이들 모습이 살아나고 산업화 시기의 얼굴들도 보인다. 천막 학교 걸린 초록색 칠판에 아침 자습, 숙제, 시험, 준비물, 소풍, 운동회 등도 보인다. 칠판과 분필은 문맹과 무지를 깨는 도끼였고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마법의 도구였다.
가난하고 배고픈 시절을 극복하고 잘 살고 싶은 꿈을 현실로 만들었다. 이제 21세기 학교 교실에서는 화이트보드와 마카펜을 쓴다. 전자 칠판과 컴퓨터, 대형 스크린이 리모콘으로 작동되고 핸드폰의 미러링 기능과 AI 기능 등 첨단 기자재로 바뀌었다.
칠판과 분필의 역사가 끝난 것 같았는데 사라질 뻔한 명품 분필을 살려냈다. 불필의 새역사를 쓰고 있는 사람들이 분필 이야기를 이어가고 있다.
1932년 일본 사람 와타나베 시로 씨가 ‘일본초크제조소’에서 시작하여 1947년 ‘하고로모’로 이름을 바꿔 3대를 이어온 분필이다. 분필계의 에르메스로 불린다. 매끄러운 필기감과 압도적인 내구도로 ‘천사의 눈물’로 만들었다고 극찬한다. 한 번 사용해 본 분들은 이 분필만 찾는다.
그런데 2015년 3대 사장 와타나베씨가 위암으로 회사 경영이 어려워졌다. 성공한 딸 셋과 사위들 누구도 사양길(?)의 분필제조회사를 맡을 사람이 없었다.
‘하고로모’ 폐업설이 나돌았다. 사재기 쟁탈전이 일어났고 스탠퍼드대학교 교수 한 분은 15년 치를 사 놓았다. 일본 분필업체들이 인수를 나섰지만 3대째 내려오는 분필 제조법에만 관심을 보였다. 창업정신과 ‘하고로모’ 이름을 유지하는 것에는 관심이 없자 실망하여 인계를 거부했다.
그때 ‘하고로모’ 분필에 반한 한국의 수학 강사 신형석이 나섰다. ‘하고로모’ 수입 회사를 준비 하다가 이 소식을 들었다. 일본으로 건너가 협상을 했지만 한일간의 미묘한 관계가 앞으로 가로막았다.
폐업할지언정 한국에 넘길 수 없다고 만나주지도 않았다. 신형석은 “세상에서 가장 좋은 제품은 가장 마지막에 사라져야 한다.”라는 말로 설득을 했다. 신형석의 진심을 안 사장은 ‘하고로모’ 이름을 유지하는 조건으로 인수를 허락했다. 3대째 내려온 시설과 제조법 일체를 인계하기로 했다.
시설만 컨테이너 16개 분량이었다. 한국으로 옮기는 데 6개월이 걸렸다. 사장이 직접 내한하여 설치와 생산과정을 도와주었다. 현재 한국에서 생산하는 ‘하고로모’의 품질은 2015년 생산분과 동일하다.
하마터면 사라질 뻔한 명품 분필이 한국에서 생산되고 칠판 그림을 그리는 분 덕분에 추억 여행을 할 수 있었고 세계 수학자들이 명품 분필을 쓸 수 있게 되었다.
칠판과 분필로 성장한 대한민국의 성장사에 명품 분필을 품은 한국인의 집념에 박수를 보낸다. ‘전시 독본’이 마련되기 전 천막 교실에서 ‘ㅅ’ 다섯 개로 사람됨의 인성을 가르쳤다.
“사람이면 다 사람이냐, 사람다운 사람이 사람이다” “인간이면 다 간이냐 인간다운 인간이 인간이다”의 그 인성을 회복하자. ‘바를 정(正)’자를 쓰며 반장을 뽑으며 분필로 배운 민주주의 기본정신을 살려내자. 그리고 6.25가 미국에 대항하고 북한을 돕는 전쟁이었다는
‘항미원조’가 같은 허무맹랑한 주장을 칠판에서 지워야 한다.
제대로 된 성품이어야만 첨단과학 및 우주와 해양, AI 시대의 난제들을 풀 수 있다.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작은 문제부터 우리가 당면한 난제들을 초록색 칠판에서 분필로 답을 찾자.
칠판 작가처럼 ‘희망의 잇는’ 꿈의 그림을 그리자. 녹색 칠판에 삼색 분필로 가르치고 배우던 그 정신을 회복하자. 각자의 녹색 칠판에 아직 해결하지 못한 ‘호국보훈’의 문제들을 분필로 풀어가자. 우리는 새로운 ‘파주시대’를 열어갈 사명자들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