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포대 박미주 교수
● 11월 11일, 숫자 ‘1’처럼 곧은 사람을 만나다
11월 11일 오전 11시, 파주시청 사거리 근처의 한 사무실. 빼빼로데이의 숫자 ‘11’이 세 번 겹친 그날 그 시간, 기자는 김포대학교 박미주 교수를 만났다.
그녀의 이력은 화려하다. 김포대학교 교수, 심리상담 전문가, 한국에니어그램경영협회 부대표, 프랜차이즈 CEO, 파주문화재단 이사, 작사가까지. 하지만 직접 마주한 그녀는 화려한 직함보다 ‘밑바닥에서 쌓아 올린 단단함’이 먼저 느껴졌다.
“이제 나이도 경륜도 쌓이다 보니, 여러 매체에 제 이야기가 인터뷰로 나갔어요. 네이버에도 ‘공순이에서 교수까지’라고 뜨더라고요.” 그녀는 담담히 웃었다. 그러나 그 웃음 속에는 수많은 새벽과 눈물이 숨어 있었다.
그녀의 삶은 단순한 성공담이 아니다. ‘공순이’라는 단어가 상징하는 고단한 현실을 딛고 일어선, 한 인간의 의지와 자존의 드라마였다.
● 17만 원짜리 인생이 준 배신감
박 교수의 인생은 초등학교 졸업과 동시에 시작된 ‘생존의 무대’였다. 6남매 중 막내였던 그녀는 중학교를 마치자마자 공장에 들어갔다. “지금도 제 키가 155㎝ 정도밖에 안 돼요. 그땐 더 작았죠.” 작은 몸으로 밤샘과 철야를 반복하며 월 17만 원을 벌었다.
그 돈은 고스란히 부모님 생활비로 들어갔다. 공장 내 300명 중 가장 어렸지만, 가장 먼저 출근하고 가장 늦게 퇴근했다. “불이 다 꺼지는 걸 확인해야 마음이 놓였어요.” 그녀의 지나친 ‘책임감’은 그때 이미 체질이 베어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세상을 보는 눈이 바뀌었다.“사무실에 예쁜 유니폼을 입은 직원이 들어왔어요. 전화만 받고, 하는 일도 깨끗하고 편해 보였죠.” 부장에게 물었다.
돌아온 대답은 짧고 냉정했다. “몰라서 물어? 쟤는 고등학교 나왔잖아.” 그 말은 그녀의 가슴에 깊은 비수를 꽂았다. 그날, 그녀는 서점으로 달려가 검정고시 교재를 샀다. 6월 초, 단 두 달 만에 8월 시험을 향해 달렸고 결과는 ‘합격’. “그 한마디가 제 인생의 리셋 버튼이었어요.” 그날 이후, 그녀는 ‘공순이’가 아닌 ‘도전자’로 인생을 다시 시작했다.
● 꼬마 원감의 책임감검정고시 합격 후, 그녀는 야간대 유아교육과에 진학했다. 졸업을 앞두고 교수의 추천으로 한 유치원 면접을 보았다. “그런데 제안받은 자리가 놀랍게도 ‘원감교사’였어요. 원감이 뭐 하는 자리인지도 몰랐는데, 그냥 ‘해보겠습니다’라고 했죠.”다음 달부터 출근하라 했지만,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아직 공장에 사직서도 안 냈어요. 그걸 마무리하지 않고 옮기면 책임 없는 행동이죠.”
그녀의 진심 어린 말에 다니던 공장의 부장은 감동했다. “걱정 말고 너의 갈 길 가라.”라는 격려와 함께 깔끔하게 그날로 퇴사 처리를 해주었다. 그녀는 그렇게 유치원 원감으로 새출발했다. 몇 년이 지난 후, 수원의 한 어린이집을 운영하며 ‘프로 사장님’으로 거듭났다. 그녀의 인생을 이끄는 가장 강력한 엔진은 바로 ‘책임감’이었다.
● “포기도 방법이다” - 사업가로의 도전교육
현장을 떠난 그녀는 외식 프랜차이즈 업계로 눈을 돌렸다. 등갈비구이 전문 브랜드 ‘㈜더 맛 푸드’를 설립, 전국 88개 점포로 확장했다.“1000만 원, 소자본으로 창업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었어요. 처음엔 직원도 없었지만, 점차 직원을 늘었고, ‘사람 중심’으로 경영했죠.” 2004년 서울경제 SEN TV에서 선정하는 ‘100인의 CEO’로 뽑혀 TV에도 출연하며 입지를 굳혀나갔다.
하지만 사업은 늘 순탄하지 않았다. 가족 간의 법적 분쟁, 동업자 갈등 등 수많은 시련이 뒤따랐다.결국 그녀는 결단했다. “포기도 방법이에요. 버티는 게 전부는 아니에요. 손을 떼야 새로운 문이 열릴 때가 있거든요.” 그녀는 회사를 정리하고 처음으로 자신의 집을 장만했다. 그 선택이 ‘끝’이 아닌 ‘다음’을 향한 준비였음을, 지금은 누구보다 잘 안다.
● 세월호의 아픔이 잉태한 ‘작사가’
현재 박 교수는 김포대학교 교수로 강의하는 한편, ‘작가 박미주’로도 활동 중이다.작사가로서의 시작은 뜻밖이었다.2014년 세월호 참사 당시, 어머니들의 오열을 보며 써 내려간 한 편의 글이 노래가 됐다.
그 곡은 제자이자 가수인 김대훈 씨가 작곡하면서 세상에 나왔다.이후 그녀는 2016년 KBS 소설극장 OST ‘그래도 너무 보고 싶어’를 작사하며 정식 작사가로 데뷔했다.
그녀와 파주시 홍보대사 가수 김대훈 씨는 어려운 아티스트들을 돕기 위해 14년째 꾸준한 협업을 이어오고 있다.
● 지역의 문화예술계에 던진 쓴소리
2024년 설립된 파주문화재단의 이사로 활동 중인 그녀는 지역 예술 생태계에 대한 아쉬움도 전했다. “어느 지역이나 잠재력 있는 전문가들이 있어요. 능력이 쓰일 때 비로소 자원이 되죠.”“아무리 훌륭한 구슬도 꿰지 않으면 하찮게 굴러다니는 구슬일 뿐이에요. 전문가를 발굴하지도, 활용하지도 못하면 지역자원 낭비죠.” 그녀의 목소리는 단호했지만 담담했다.
그녀는 또한 “정당이나 인맥이 아니라, 건강한 중도(中道)를 지향해야 유권자의 힘이 생긴다”라고 강조했다.
● 에필로그 - 바늘 대신 ‘사람’을 꿰매는 삶
어린 시절, 미싱 바늘에 손이 찔리던 소녀. 그 상처조차 감사로 돌린 여인은 이제 누군가의 손을 잡아주는 사람이 됐다. “이제는 도움받는 사람이 아니라, 후배들에게 손을 내밀어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그녀는 제자들과 함께 ‘낭독 스토리 모임’을 운영하며 함께 성장하는 리더십을 실천 중이다.
공장의 미싱 소녀에서, 대학 강단의 교수로. 그리고 이제는 지역사회에 씨앗을 뿌리는 시민으로. 그녀의 인생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포기도 방법이다.” 그녀의 포기는 단념이 아니라, 다음 장을 여는 용기였다. 이제 그녀의 바늘은 천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을 꿰매고 있다.
박미주 교수의 삶은 ‘학력’이나 ‘타이틀’로 설명할 수 없는 인간 승리의 기록이다. 그녀가 남긴 “포기도 방법이다”라는 말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진짜 용기’의 의미를 되묻게 한다.
사진제공/박미주 교수, 글/김명익 객원기자